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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의 세계사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및 영향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어 강화조약으로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면서 정식으로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파리강화회의는 1919 년 1월 18일부터 시작되어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어 일단락했다. 이 회의에는 일본을 포함한 연합국 대표가 참가했지만, 영국·프랑스·미국의 3국이 주도권을 잡고, 패전국 독일 등은 참가할 수 없고, 또 혁명 직후의 러시아·소련 정부도 참가할 수 없었다 .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 은 연합국(협상국)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전승국·패전국을 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에 의해 초래된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제국의 소멸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독일제국 (호엔조렐른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합스부르크가), 러시아제국 (로마노프가)이라는 전제군주제 국가가 붕괴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 에서도 대전 후에 터키 혁명이 시작되어 붕괴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에 지배되고 있던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은 독립을 달성하고 각각 국민 국가로서의 주권을 갖게 된다. 다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지에서는 터키 공화국 이외는 즉시 독립할 수 없었다.

 

2. 영국의 몰락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영국 은 전승국이었지만, 전쟁을 위해 피폐하고, 식민지에서도 반영 독립 운동이 활발해져 그 통제는 약해지고, 19세기 중반부터의 「대영 제국 '의 번영, 제2제국 또는 팍스-브리타니카라고 불리는 상황은 끝을 말하게 되었다.

 

3.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러시아(소련-러시아. 소련의 성립은 1922년)이 출현했다. 한편 자본주의를 번영시킨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은 '자유주의'를 내걸어 사회주의세력의 확대나 혁명의 전염을 경계하게 되었다.

 

4. 미국 번영


도중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미국은 전후에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고 세계 강국으로 올라갔다. 전후의 1920년대는 「영원한 번영」이라고 불리는 최성기를 맞이한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주도적 입장에 대해 국제연맹 결성에 노력했지만, 국민 중에는 세계대전 참전을 의문시한 사람들도 많고, 또 전통적인 고립주의에 고집하는 공화당 이 의회 로 반대했기 때문에 미국 자신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5. 동유럽 국가의 독립


동유럽의 대국에 종속하던 제민족이 미국 대통령 윌슨의 ' 민족자결 '의 이념에 따라 전후 독립을 달성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에 따라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새롭게 유고슬라비아를 건국했다. 또 폴란드, 발트 삼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6. 식민지의 민족주의 운동 격화


제국주의 국가 간의 모순이 세계전쟁에 다가갔기 때문에 그때까지 식민지로 지배되어 온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 중에서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에서의 간디 등에 의한 독립운동의 전개, 서아시아 아랍인의 자립의 움직임, 중국의 5·4운동이나 조선에서의 3·1독립운동에서 볼 수 있는 움직임 등이 중요하다. 또 대전 후의 민족독립운동은 러시아혁명에 의해 등장한 사회주의운동과도 연결된다.

 

7. 새로운 무기와 총력전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희생이 비전투원에게도 직접 ​​미치는 형태인 현대전이 시작되었다. 특히 항공기, 독가스, 전차, 잠수함 등 새로운 무기의 출현은 대량 살육과 비전투원을 휘말리는 현대 전쟁의 특색을 볼 수 있다. 또 전쟁이 일부 직업적인 군대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나 국내 체제, 여론의 결속 등도 요구되는 총력전이 된 것도 현대의 전쟁의 특징이었다 .

 

8. 세력 균형론에서 집단 안보로


지금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배워야 할 것은 열강이 각각 군사동맹을 맺고 이해가 대립하는 진영과의 세력 균형을 잡는 국제정치의 본연의 방법이 파탄했다는 것이다. 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러시아·오스트리아라는 대국이 그 제국주의적인 이해의 대립 속에서 발칸 문제라는 선예적인 대립점이 표면화했다. 그때 각국이 전쟁 회피를 위해 취한 것이 비스마르크 시대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세력 균형론 이었다. 게다가 양국간의 군사동맹이나 영토·식민지 분할 협정은 대부분 비밀조약으로 여겨졌다. 이런 세력 균형론, 비밀 외교가 사라이예보의 총성에 의해 파탄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 는 유럽 열강 이외의 미국이 주도권을 잡았다. 윌슨의 이념은 국제연맹 이라는 국가 간 협의의 장을 만들고 비밀 외교를 배제하고 국가 간의 분쟁 을 해결하자는 집단 안보에 있었지만 그 이념이 현실이 되었다 . 이것이 천수백만이라는 희생을 낸 세계전쟁이라는 비극에서 인류가 배운 것이다. 다만 불행하게도 윌슨의 철학은 당 미국이 의회가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았고, 한편으로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국 소련-러시아를 그 집단에 가하지 않았던 것, 또 패전국 독일 도 가맹시키지 않고 가혹한 배상금을 주로 하는 강화조건을 밀어붙인 것 등에 의해 충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러한 단점에서 이 전쟁에는 '제1차'라는 명칭이 뒤에 붙어 버리게 되었지만, 집단안보의 이념으로 세계평화를 유지하려고 시도한 것은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다는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 '제3차'의 발발을 구부러지게도 억지할 수 있다. 잘못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집단적 자위권'이 아니라 '집단 안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