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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의 세계사

제1차 세계 대전의 경과3 (유럽 이외의 전투, 일본의 참전)

1. 유럽 ​​이외의 전투


제1차 세계대전은 대부분이 유럽의 독불과 독로 국경, 발칸 반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부근이 전장이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 일본이 참전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도 전장이 되는 곳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측에서 참전했기 때문에 영국은 재빠르게 1914년, 이집트를 보호국화해달라고 오스만 제국에 통보했고 수에즈 운하를 확보하여 카이로를 거점으로 팔레스타인으로의 진출을 도모했다. 1916년 6월, 아랍 홍해 연안의 히저스 지방에서 아랍 족장 후세인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영국 해군의 정보 장교 토마스 로렌스가 파견되어 로렌스는 아랍군의 고문격이 되어 게릴라전을 지도했다. 로렌스는 아랍 게릴라를 이끌고 오스만군의 철도를 파괴하는 등 후방교란을 중심으로 1918년 9월까지 활동했다. 이것이 유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이다. 그런데 그 한편 영국·프랑스는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서 전후의 오스만 제국령 분할에 대해서 결정하였다. 이에 더하여 영국은 1917년 11월에 발포아 선언을 내고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건설을 승인하는 등 모순되는 외교를 전개하기도 했다.

 

2.일본 참전


개전 직후인 1914년 8월 영국은 일본에 "동중국해의 독일 함대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은 일영동맹에 근거해 즉시 출병을 결정했지만, 일본의 중국·태평양 방면에의 진출을 경계하는 미국이 영국에 요청을 중지하도록 신청했기 때문에, 영국은 그에 따라 독일 함대 공격 요청을 취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강행하였다. 8월 15일에 독일에 대해 최후 통첩을 했고 응답이 없다고 판단하여 1914년 8월 23일에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다. 이후 9월 2일 산동반도 북쪽 발해만을 향한 용구에 상륙, 한 달 정도로 산동성의 성도 제남에 들어가 독일이 관리하던 산동철도를 지배하에 두기도 했다.또한 1914년 11월 7일 교주만 입구 독일 청도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때 일본 비행기 가 처음 실전에 참여했다. 또한 독일령 태평양 제도의 마샬, 마리아나, 팔라우, 카롤린 제도를 점령했다.
이렇게 독일의 중국·태평양의 이권을 접수한 일본은, 1915년 1월, 중화민국의 조세개정에 대해 21일조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처럼 독일 이권의 계승을 목적으로 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시작했다. 일본의 노골적인 대륙에서의 이권 확장에는 영국·미국은 경계했지만, 일본을 대독일 전쟁에 참전하게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떄문에 중국에 대한 요구를 묵인하고 항의하지 않았다.
지중해에서는 독일 해군과 프랑스·영국 해군이 교전하고, 또한 흑해에서는 러시아 해군과 오스만 해군이 싸우고 있다. 독일 해군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큰 피해가 나오자 1917년 2월 영국은 일본 해군의 지중해에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은 요청에 부응해 해군은 순양함 3척, 구축함 12척을 파견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영국에 조건을 내놓았다. 그것은 전후의 강화회의에서 산동반도에 관한 일본의 권익을 지지하는 확약이었다. 영국은 즉시 동의하는 취지의 기록을 일본에 보내자 일본은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극비로 하고, 각각의 표해를 얻었다. 이들 연합국과의 비밀협정에 의해 일본 해군의 지중해파병은 실행되었다. 일본측의 피해는 구축함 1척의 다른 수척이 격침되어 78명이 전사했지만, U보트 4척을 격침, 영국의 요청에 응했다.
이 밀약은, 나중에 파리 강화회의 에 즈음해, 미국이 일본의 산동 권익을 인정받지 못한 것에 반해, 영국·프랑스가 일본을 지지한 것으로, 결국 일본의 산동 권익이 인정된 복선이 된다. 

 

3. 정국의 전환

 

개전 당초, 열강의 정상들은 이 전쟁에서 단기에 승기를 잡고 적당한 시기에 종료시킬 생각이었지만, 1914년 9월의 마르누의 싸움 이후, 그 기조는 무너지고, 당길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대로 일진 일퇴가 이어졌지만 1917년 들어 러시아 혁명과 미국 참전으로 일거에 정세가 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