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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의 세계사

제1차 세계대전의 경과 1 (개전, 동부전선, 서부전선)

1914년 7월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면서 개전이 된다. 이어 오스트리아와 맺은 독일,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가 동맹국, 세르비아와 맺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이 연합국으로 세계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유럽 동서 전선이 주전장이 되었다. 일본도 일영동맹을 이유로 협상측에 참전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아시아에도 전화가 퍼져 세계전쟁이 되었다. 1916년경부터 장기전의 양상이 되었다.

1. 개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받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 황제 프란츠-요제프 1세 와 그 정부는 세르비아인의 실행범 뒤에는 대세르비아주의 민족단체와 그것을 지원 하는 세르비아 정부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독일 제국 의 빌헬름 2세와 그 정부로부터 백지 위임을 받은 뒤, 최후 통첩을 세르비아가 거부하면서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였다. 이것이 세계전의 발발이며, 이어 러시아 제국 의 니콜라이 2세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 동원령을 내렸다. 이를 알게 된 독일이 러시아에 최후 통첩을 내리고 러시아가 이에 대답하면서 8월 1일 독일에 선전포고하게 되었다. 독일과 러시아의 개전은 필연적으로 프랑스를 참전시키게 되었고,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중립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그것을 거부하면서 3일에 선전 포고했다. 이렇게 발칸의 지역분쟁은 유럽의 열강이 연쇄적으로 가해지는 세계전쟁으로 전환해 '팔월의 포성'이 유럽에 머물게 되었다.

 

2. 서부 전선

독일군은 벨기에 영내를 파죽의 기세로 돌파, 드디어 프랑스 국내에 침입했다. 그것을 영국군의 비행기가 발견해 육상의 프랑스군에 연락, 조플 장군 밑 아래의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포착해, 9월 5일, 마르누의 싸움을 통해 그 진군을 저지 했다 .

독일은 8월 2일 벨기에에 대해 독일군의 통과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되면서 4일 침입을 시작했다. 중립국 벨기에가 침범된 것을 이유로 영국은 참전했다. 벨기에는 예상과는 달리 격렬히 저항했지만 독일군은 6일 리에주를 포위해 열차 수송식 대포로 대량의 포격을 가하고 비행선 제펠린호에 의한 공폭을 더했다. 대량의 포격과 공폭이라는 근대전이 리에주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리에주는 잘 저항하면서 8월 16일까지 버텼다.
1914년 9월 독일군은 슈리펜 계획 에 따라 대군을 벨기에에서 침입시켜 파리 서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현지 지휘관 크룩 장군은 너무 많이 돌아서 보급이 중단되는 것을 우려하여 진로를 바꾸어 파리 동쪽으로 향했다. 이동중인 독일군을 영국의 정찰 비행기가 발견, 프랑스군이 급습해 호기를 만들었다(이때 파리의 택시 600대가 병원 수송에 활약했다). 이렇게 파리 동방의 마르느 강 부근에서 마르느의 회전이 되었지만 독일 총사령관 몰토케는 당시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국경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받아 병력을 일부 이동시키기 위해 독일군 전선을 후퇴시킨 것이다. 이렇게 당초 6주 만에 파리를 함락시킨다는 독일의 전략이 무너져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게 되고, 이른바 서부전선에서의 교착한 참호전으로 이행해 갔다 .


[마르누의 택시]

9월 5일 프랑스 제6군(총사령관 조플)은 마르느에서 독일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파리 택시들을 대군급으로 끌어 모아, 전선에의 병원 수송을 하게 했다. 그 수는 600대로 전해진다. 그 작전은 벌써 성공해, 마르누 회전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이 전투는 참호전/진지전의 교착 상태에 들어가 독일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파리 함락의 위기는 구원되었다. 르노제의 택시는 “마르누의 택시”로서 역사에 이름을 두고 있다. 현재도 그 하나는 파리의 르노 박물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장기의 참호전으로 인해 독일은 당초의 전략인 단기전 전략은 실패하고, 독불국경선에 따라 서부전선이 형성되어 양군 모두 참호를 파고 대치하는 장기전에 돌입 했다 . 독일군은 참호전에서의 신전술로서 독가스를 개발, 1915년 4월 22일의 이플의 싸움 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서부전선에 실제로 참여한 독일의 에리히 레마르크는 1927년 그 때의 전장 체험을 바탕으로 '서부전선 이상 없음'을 발표했다. 이것은 가혹한 전장의 현실을 고발한 반전문학으로서 세계적인 반향을 불렀다. 일찍 이듬해 1930년 미국 루이스-마일스톤이 영화화해 제3회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 후도 몇번이나 영화화되고 있지만, 역시 최초의 이 작품이 선명하다. 한 명의 병사는 죽었지만, 전선에서 본부로 보내진 보고는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전문이었다. <에리히=마리아=레마르크/진 도요요시역 “서부 전선 이상 없음”신시오 문고>

 

3. 동부전선

제1차 세계대전 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부에 형성된 전선을 동부전선이라고 한다. 1914년 8월 러시아군이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 대패했기 때문에 전선을 후퇴시켰다.

독일 동쪽 동부 전선 에서 1914년 8월 17일 독일 영동 프로이센으로 진격한 러시아군이 탄넨베르크에서 독일군에 패했다. 러시아군은 당초 독일의 예상을 웃도는 속도로 진격해 왔지만 점차 보급과 통신의 미비가 드러나 진격이 정체됐다. 독일의 전선 세우기에 파견된 신사령관 힌덴부르크 대장과 루덴도르프 참모장은 러시아군의 무선을 가로채서 그 진로를 알고, 열차로 대군을 이동시켜, 탄넨베르크의 러시아군을 급습해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때 전투에서 25만명의 러시아병 중 12만5천이 전사나 포로가 되어 독일 측의 손해는 1만에 불과했다. 탄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의 패배는 차리 정부의 위신을 현저하게 떨어뜨려 러시아 혁명을 발발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