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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의 세계사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1. 제 1차 세계대전의 근본적인 원인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호아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된 것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열강의 영토·식민지·세력권을 둘러싼 대립이다. 열강은 19세기 말부터 각지에서 충돌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주로 발칸 문제에 있어서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에, 각각 배후에 있는 독일과 러시아가 응원하는 형태가 되었다. 또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 으로서 전개 한 3B 정책 등이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어서 영국의 3C 정책이나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이 충돌한 것 등으로부터 2대 진영이 형성되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의 정세가 복잡하게 관련되었다. 독일측에 붙은 오스만 제국 에 대해 영내의 아랍인 세력을 영국이 지원하면서 서아시아에도 전쟁은 확대되어 동아시아에서는 일영동맹을 구실로 한 일본이 중국이나 태평양의 독일 권역을 공격했다. 이렇게 이 전쟁은 인류 최초의 '세계전쟁'이 되었다.

 

2. 새로운 전쟁 목적의 홍보

본질은 제국주의 열강의 비밀군사동맹을 통한 세력균형에 의한 평화유지가 무너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제정에 대한 민주주의의 고수라는 새로운 전쟁 목적이 홍보되었다. 연합제국은 이 전쟁을 '카이저(독일황제)의 전제정치'에 대한 시위 싸움, 세계지배를 목표로 하는 독일군국주의를 타도하고 국제정의를 유지하고 소국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지만, 미국의 참전 후에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주주의가 번창할 수 있는 세계로 하기 위한 전쟁”,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a war to end war)”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이에 대해 독일 측 국가들은 전쟁으로 민족적 대립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선전했지만, 이윽고 반동적인 러시아, 위선적인 영국의 타도를 그 전쟁 목적으로 표방하게 되었다. <오카 요시타케 『국제 정치사』1955 재간 2009 이와나미 현대 문고 p.167>

 

3. 교전국

제1차-세계대전-교전국


제국주의의 열강이 동맹국측과 연합국측의 2진영으로 나뉘었고 주변 제국이 이해관계의 대립, 영토적 야심 등의 의혹으로부터 어느 한 진영에 참가하면서 세계가 크게 이분하게 되었다. 동맹국은 삼국동맹의 독일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기축으로(이탈리아는 당초 중립을 선언), 오스만 제국 , 불가리아 등이 더해졌다. 연합국(협상국이라고도 함)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삼국협상을 중심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그리스 의 발칸 국가를 포함했고 삼국동맹을 이탈한 이탈리아는 1915 년 5월 연합측에 참전했다. 유럽 ​​이외에서는 아시아에서는 1914년 8월 23일 일본, 1917 년 8월 14일 중화 민국이 참전, 연합국 측에는 32개국이 참전했다. 또한 영국의 해외 자치령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도 협력해 식민지 인도에서도 징병됐다. 미국의 참전은 대전의 후반인 1917년 4월에 이루어졌지만 이는 연합국측의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 반전운동과 그 좌절

각국에서는 전쟁 반대 목소리도 많았다. 특히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정당은 제국주의전쟁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2인터내셔널도 즉시 전쟁 반대 성명을 내렸다. 프랑스에서는 조레스가 가장 열심히 전쟁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그는 개전 직후에 암살당했다. 실제로 전쟁이 시작되면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도 점차 자국의 전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게 되어 국제연대에 의한 반전운동은 붕괴되었다. 또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도 전쟁지지의 주류파인 샤이데만과 에이버트가 우세해져 어디 까지나 반전을 주장한 카우츠키, 립쿠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독립 사회당을 결성해 분열했다. 러시아에서도 멘셰비키와 에스엘은 전쟁 지지를 표명하고, 전쟁 반대를 주장한 볼셰 비키는 소수파가 되어 탄압되었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은 노동자의 국제연대를 목표로 한 제2인터내셔널의 운동을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